디지털/오디오 이야기

기술적으로 미완성, 비플랫 이어폰 사용기

모게모게 2017. 10. 30. 23:09

개인자작 이어폰?

 

한때 트위터에서 꽤나 화제가 된 이어폰이 있었습니다. '비플랫' 이어폰이라고 부르는 이어폰은, 한 블로거(개인)이 만들어 트위터상에서 무료나눔 홍보를 했습니다. 

이정도면 평범한(?) 이어폰이었겠지만,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린다는 과장 듬뿍 리뷰, 그리고 빠가 까를 만든다고, 그런 검증도 되지 않은 이어폰을 왜 쓰는가 까내리는 사람으로 탐라는 혼파망이 되었고, 급기아 전혀 관심이 없던 저도 "도대체 어떤 소리가 나길레?"라는 궁금증은 커져만 갔습니다.

 

마침 이웃분이 구매를 하셨고, 쓰레기가 아니라는 평에 소리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지기만 했고, 결국 그 분께 대여를 요청했습니다. 잊어버린 사이, 이어폰이 도착했습니다.

 

자작품은 아닌 퀄리티, 하지만 아쉬운 마감

 

본체만 대여받았기 때문에 구성품은 일체 없습니다. 들어있는 메뉴얼이 좀 황당하다지만, 알 길이 없으니 패스. 알아보니까 풀패키지는 따로 있고 간소화 패키지라고 해서 이어폰 단품만 판매하기도 하네요.

 

 

빤딱빤딱 광이 나는 재질입니다. 최근에 실버 말고 다른 색으로도 나오는 모양이더군요.

자작품이라고 해서 뭔가 마감이 개판인 걸 생각했지만 그냥 시판되는 이어폰이랑 큰 차이도 안 나네요.

 

유닛은 금속재질이라 무거워 보이지만 그냥 평범한 무게를 가집니다. 하지만 본체 크기는 조금 큰 편이라 귀가 작으신 분들은 착용하면 귀가 아플수도 있겠네요.

 

 

 

코드는 얇은 칼국수선이며, 특별히 지적할만한 사항은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이어폰이네요.

하지만 리모트 디자인이 굉장히 익숙해서 찾아보니,

LG 쿼드비트 2의 리모트랑 쌍둥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판단은 여러분께 맞기죠.

리모트는 제 폰인 갤럭시 S8에서 3버튼 모두 동작하고 통화도 잘 되었습니다.

 

 

다 좋은데 한 가지 흠은 뒷면 마감은 썩 좋지 않습니다. 마감이 덜 되어 울퉁불퉁한 표면과, 대충 마킹해 둔 오른쪽 'R'표시가 비싼 이어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뭔가 이상한 소리

 

 

크기 비교 - 비플랫 vs 오디오테크니카 LS200

 

처음 귀에 꽂고 음악을 틀었을 때 강려크한 저음을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멀쩡한 소리가 났습니다.

"어 괜찮은데? 이거 생각보다 좋은 거 아니야?"

 

라고 조금 더 들어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귀에 밀착되었지만 어디선가 소리가 새는, 마치 귀에 꽂지 않고 걸친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봉된 이어팁이 싸구려라서, 또는 귀에 맞지 않아서 그럴 수 있으니, 트리플파이에서 쓰던 S크기 팁을 꺼내서 달아보았습니다. 크기는 이어폰에 딱 맞더군요.

 

 

이어팁 비교 - 순정(좌) vs 트리플파이용 팁(우)

 

이어팁을 비싼 것으로 바꿨으니 밀착이 잘 되겠지? 했는데 여전히 뭔가 덜 꼽힌 느낌이 듭니다. 소리가 자꾸 새서 외부 소음이 계속 들어오더군요. 짜증이 나서 귀에 이어폰을 억지로 밀어넣기 시작합니다. 귀가 아플 때까지 밀어넣다가 갑자기 소리가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더군요. 하지만 손을 놓는 즉시 원래 소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보통 이런 문제는 이어팁이 귀에 밀착이 안 되거나, 팁이 째져서 구멍이 난 경우인데, 이어팁을 바꿔도 계속된다면 두 가지를 의심해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 조립 불량

2. 설계 미스

그리고 1분도 되지 않아 저는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유닛의 단점을 숨기기 위해 의도된 설계 미스, 전면 덕트

 

 

해답은 바로 빨간 원 안에 보이는 작은 구멍, 즉 에어덕트였습니다. 셀로판 테이프로 이 구멍을 막고 들어보니, 그제서야 다른 이어폰과 같이 귀가 덮힌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전 곧바로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의 저음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했습니다. 저음이 이어폰 안에서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만든 덕트였기 때문입니다.

 

이어폰 덕트는 꽤나 흔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고막 안의 기압상승을 막고, 소리튜닝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애플의 이어팟을 보면 소리가 나오는 구멍 말고도 앞뒤로 구멍이 나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0db.co.kr/xe/REVIEW_0DB/14390

 

아니, 이어팟에는 저렇게 큰 구멍이 뚫려있는데 저깟 작은 구멍하나가 대수인가요?

네, 대수입니다.

 

만약 지금 비플랫 이어폰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면 지금 이어폰 구멍을 셀로판 테이프로 꼼꼼히 막고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이어폰이 이렇게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는 이어폰이었나 의심하실 겁니다.

 

제가 까고자 하는 부분은 덕트의 유무가 아니라 덕트를 설계한 의도, 그리고 결과값에 대한 부분입니다. 일단 단순히 구멍을 뚫어두었기 때문에 저음의 양이 조절되는 것이 아닌 아에 저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럼에도 베이스는 잘 들린다구요? 그건 중저음의 타격감과 저음의 울림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제 귀가 틀리지 않았다면, 예전 90년대 후반의 오픈형 이어폰에서나 보던 저음 roll-off를 커널형에서 구현해 냈습니다. 저음이 똑바로 안 나온다는 겁니다. 만약 저 덕트를 필터로 적당히 막아서 저음을 어느정도 살렸더라면 이렇게 까지는 않았을겁니다.

 

그리고 뭔가 소리에 울림이 있다, 현장감이 돈다, 소리가 퍼진다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덕트 때문입니다. 좋지 않냐구요? 조금 다르게 말하면 이어폰에 구멍이 나서 소리가 새는 상태입니다. 전 이걸 정상상태, 즉 완제품의 상태라고 말하고 싶지 않네요.

 

대부분의 저가형 이어폰이 이 덕트처리를 대충하거나 안 하는 게 사실입니다. 예전에 모 이어폰에 대해 제가 "이어폰을 까고 동봉된 이어폰솜을 구겨넣으면 소리가 엄청 좋아져요"라는 글을 올려서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덕트 설계를 잘못한 것이죠. 하지만 그건 천원짜리 무료배송 이어폰이었고, 이건 2만원이 넘는 이어폰입니다. 구조에 무관심하거나, 아에 모른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여담이지만, 이어폰 뒷면에 크게 뚫린 덕트는 소리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지만 이걸 막고 들어도 소리의 차이는 느끼기 힘듭니다.

 

 

덕트가 가져오는 또 하나의 재양, 공진

 

덕트 설계를 잘못하면 소리가 새나가서, 저음만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특정 대역은 부스트되어서 흔히 말하는 공진이 발생하게 됩니다. 다행히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절묘하게 귀에 거슬리는 대역은 피해가서, 대부분의 음악에서는 이를 느끼기 힘듭니다. 하지만 녹음 상태가 조금 좋지 않거나 특이한 곡을 들으면, 바로 이 이어폰이 잘못 설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곡을 듣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거슬린 곡은 AKINO from bless4 - 海色(미-이로)입니다. 이 곡은 특정 이어폰에서 들으면 보컬이 조금 답답한 느낌이 들지만, 비플랫으로 들으면 평소에 알던 목소리와는 다른 이상하게 보컬의 목소리가 귀에서 울리면서 귀가 따가운 소리가 납니다. 바이올린도 뭔가 짜증나게 들리구요.

 

그 다음으로 공진, 피크를 느낄 수 있었던 곡은 鈴木このみ(스즈키 코노미) - This Game입니다. 이 곡 후렴구 끝의 샤우팅에서 2k대역의 목소리가 쭉 나오는데[각주:1], 다른 이어폰/헤드폰과 다르게 비플랫은 귀가 아플정도로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아래 spectrogram에서 2.0k에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인데, 다른 곡들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측정이 필요없는 정도로 엉망일 것 같은 주파수 응답, 소리 평가 

 

 

전문적으로 까내려가기 전에 먼저 칭찬할 부분부터 칭찬하고 가겠습니다. 주파수왜곡은 준수합니다. 지저분한 소리가 나올 줄 알았지만 의외로 깔끔한 소리가 나네요. 저음/고음 다 빼먹고 보컬만 유난히 강조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까봅시다. 저음이 텅텅비는 건 앞에서 깠으니 중음, 보컬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중음역대는 꽤 잘 들립니다. 성별 무관하게 보컬이 크게 들리고 악기 소리도 강조되어 있으면서, 또 혼잡할 정도로 뭉치지는 않습니다. 딱 들었을때 이 이어폰이 쓰레기가 아니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특정 곡에서 유난히 이상하게, 또는 귀가 따갑게 들리는 보컬을 봐서는 좋은 소리라고 평가하기는 힘듭니다. 단점이 티가 나기 힘들게 숨겨져있을 뿐이죠.

 

고음은 저음과 비슷하게 나는 듯 하지만 전혀 나오지 않는 특성을 보입니다. 귀에 챙챙거리는 고음이 들리긴 하지만 비교적 양이 작고 그냥 소리가 나오는 수준입니다. 7k부분에는 큰 딥이 있는 것처럼 들리며, 12k 이상도 들리긴 하는데 뭔가 흐릿하게 들립니다. 스펙시트만 보고 까서는 안 된다고 전에 말한 적이 있는데, 듣고 보니 그 스펙시트는 나름 정확했던 것 같네요(물론 다른 이어폰들이 스펙시트만큼의 성능을 보여주는 건 아닙니다).

이 역시 그냥 대중가요에서는 차이를 느끼기 힘든데, 고음역대를 잘 활용하는 전자음악들을 들어보면 차이를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쿼드비트 3에서도 들리는 고음이 비플랫에서는 또렷하게 들리지 않는 음악들이 있죠.

 

 

미완성 이어폰

더욱 까려고 하면 더 깔 거리도 많고, 이렇게 만들면 더 좋았을껄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전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이 이어폰은 미완성입니다.

개발중인 시료를 다듬은 것 같습니다.

 

유닛 자체의 성능은 준수하고, 중음역이 강조되는 나름대로 특색[각주:2]있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요즘 같이 내가 듣는 것이 기준이 된 마이파이 시대에서 측정치로 무조건 제품을 까내릴 수는 없지만 전 그럼에도 이 제품은 미완성 제품이고, 부족함이 많~이 남은 제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돈을 주고 산 제품이라면 유닛을 분해해서 필터 작업하고, 노즐을 좀 더 길게 한다거나 등의 튜닝을 해보고 싶지만 저도 제품을 대여받은 입장이라 마음대로 개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2만원 넘는 돈을 줘가면서 튜닝하고 싶지도 않네요. 요즘 중국산 이어폰 사면 저거보다 싼 가격에 준수한 소리를 내는 1DD + 1BA 하이브리드 이어폰을 살 수 있고(심지어 MMCX 커넥터 장착!), 그게 가지고노는 재미는 더 있을 것 같으니까요.

 

판단은 여러분께 맞기겠습니다.

 

 

ps. 급하게 쓴 글이라 추후 수정할 사항이 있을 경우에는 원본표시 후 내용을 갱신하겠습니다.

ps2. 혹시나 제가 받은 제품이 덕트가 안 막힌 불량품일 수도 있습니다. 양쪽 다 같은 소리를 내기 때문에 양쪽 다 불량일 가능성은 한없이 낮겠지만, '이 이어폰 저음 빵빵하게 잘 나와요' 라고 생각하신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구매처에 교환 요청을 해보겠습니다.


  1. (二人だけは 二人信じてる의 마지막 부분) [본문으로]
  2. (오테의 착색처럼 음색이 독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