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메모리가 가격 대비 아주 비쌀 때, 가격이 지금의 1테라 SSD와 같은 시기가 있었습니다. 1기가라는, 지금 생각하면 별 거 아닌 용량을 위해서 사용자가 지불해야 하는 가격은 지금 시세로 따지면 무시무시했고, 그래서 음악이 몇 곡 들어가지 않는 128MB, 256MB 같은 작은 용량이, 이것에 불만족한 사람들은 Data CD 플레이어나 압축 MD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건 컴퓨터에 사용되는 하드디스크를 넣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휴대용으로 설계된 1.8인치 하드디스크를 장착한 모델들이 당시 잘 나가던 우리나라 MP3 기업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그게 바로 아이리버 H100, H300 시리즈, 코원 M, X, i6 시리즈입니다. (삼성도 한 모델인가 있는데 그건 흑역사 취급인지라...) 

물론 유명한 애플도 예전 아이팟에는 마이크로드라이브 라고 불리는 CF카드와 같은 사이즈의 HDD를 장착한 모델이 있었고, 현재에는 아이팟 클래식이라는 모델을 발매했습니다.


하드디스크 타입의 음향기기의 장점이자 단점은 요구되는 전력량이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이게 왜 단점뿐만이 아닌 장점이 되는 이유는 전원소스가 빵빵하니 앰프부도 전력을 덜 아껴도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만 해도 리튬이온 전지보다는 니켈(Ni-Cd, Ni-MH) 전지 또는 알카라인 전지가 많이 사용되었고, 이 전지들은 리튬전지에 비해 저전압, 저용량의 특징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앰프부 또한 저전력화되어 설계되었고, 이는 소리의 힘 부족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드는 최소 5V[각주:1] 의 전압을 요구했고, 지금이야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5V도 당시에는 건전지 4개가 들어가는 큰 기기로 칭해집니다. 그에 따라서 필요한 배터리 양과 전원부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고전압의 칩셋과 앰프단을 구성할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건 음질의 향상을 가져왔습니다. 실제로 많은 HDD를 장착한 음향기기들은 좋은 소리를 내는 명기라는 호칭을 아직까지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두 하드디스크를 사용한 음향기기입니다. 하나는 출시 직후, 하나는 어제(...) 구매했습니다.


왼쪽의 코원 A3는 숨겨진 명기입니다. 보시다시피 4인치 터치미지원 PMP 모델인데, 당시 PMP 중 가장 선명한 화질로 칭찬을 많이 받은 모델입니다. 

하지만 쓰는 사람들 중 음감을 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이 녀석 소리가 좋다"라는 겁니다. 인터페이스는 상당히 불편하고, 하드의 절전모드로 탐색이 버벅거리고, PMP OS 특성 상 음악 로딩에 시간이 조금 걸리는 상당한 불편함이 있지만 지금 들어도 단단하게 잡아주는 저역과 풍부한 소리는 현역으로 불리기 충분하며 다른 유저들은 당시 코원의 다른 하드디스크 플레이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라고 하더군요. 


오른쪽의 아이리버 H340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리버의 최고급 MP3를 담당하던(AK시리즈가 나오면서 왕좌를 물려줬죠) 녀석입니다. 아이리버 음감의 최고봉은 사실 H100 시리즈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H300 시리즈가 컬러액정을 채택하면서 화노가 증가하고 음이 불안정해졌다네요. 하지만 H100과 H300 모두 당시 거치형 기계에만 사용되던 최고수준 DAC를 그대로 박아넣어서 음색은 지금도 사용하는 유저들이 있을 정도로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제품입니다. 전체적으로 묻히는 음이 없이 화사한 음색을 가집니다. 게다가 락박스 공식지원 모델로 그 활용성은 무궁무진하죠.

이 녀석의 단점은 배터리와 시끄럽고 두꺼운 하드디스크입니다. 소음이 제 3테라 하드디스크보다 더 시끄럽습니다ㄷㄷㄷ. 그리고 락박스가 은근히 버벅여서 빠른 퍼포먼스에 적응된 현대인들이 쓰기에는 답답해 미칠 수준이죠.




막상 이걸 그래프로 계측하면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스마트폰의 그것보다 더 떨어지는 성능을 보여줄 때도 있죠. 예전에 이걸 궁금하게 여겨서 ABX 테스트를 해 본 적이 있는데 구별이 쉽지 않았습니다. 막상 가리고 테스트하면 이게 더 좋은건지 못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저 뿐만이 아니라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구형 기기들의 소리에 열광하고 아직까지 찾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말로 설명하기는 참 곤란한 부분이지만 그냥 듣고 있으면 소리가 좋다는 게 느껴진달까요, 그런 미묘한 차이가 오늘 음감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음악을 조금 더 듣고싶게 만들어주죠.



그냥 하드형 MP3 영입기념 뻘글이었습니다. 하드가 너무 시끄러워서 CF로 개조하고 싶네요. 4만원이면 가능할 것 같은데 막상 그런 투자하기는 귀찮고....

  1. (간혹 3.3V로 구동되는 드라이브도 있긴 합니다.) [본문으로]